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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우크라전 여파로 임시 가동했던 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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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51회 작성일 24-04-0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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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재가동했던 석탄화력발전소 7곳의 가동을 중단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도이체벨레(dw) 보도에 따르면 독일 발전업체 RWE와 LEAG는 지난해 10월 재가동한 화력발전소 7곳의 가동을 이번 부활절 기간에 중지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서부 독일에 있는 화력발전소 5곳은 가동중단 상태였다가 독일 정부가 러시아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겨울 동안 재가동했던 것이다. 독일 동부의 2곳은 가동중단 예정일을 연기한 상태에서 운영하다가 이번에 가동이 중단됐다.
독일 경제부는 가동 기간 중 배출된 온실가스를 상쇄할 방안을 오는 6월까지 제출해야 한다.
독일은 애초 203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를 모두 폐기할 계획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2022년 7월 석탄화력발전소를 재가동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독일의 탈화석연료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지켜보며 탈원전을 결정한 독일은 2022년 말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폐지할 계획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원전 3곳의 운영을 3개월 연장한 뒤 지난해 4월15일 원전 가동을 모두 중단했다.
독일 녹색당은 성명을 내고 악화되는 기후 위기를 고려할 때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환영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탈레스와 ‘질병은 악령의 장난’이라 생각한 히포크라테스…다르지만 닮은 명리학과 뉴턴역학영화 <파묘>가 불러일으킨 ‘반일 논쟁’에 풍수 전문가들도 쇠말뚝만으로 한 나라 기운 바꾸지 못해 주장우리를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더욱 아프게 하는 건 ‘제3자 변제’·‘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같은 동족이 박은 쇠말뚝이다
묫자리를 둘러싼 기묘한 사건을 다룬 영화 <파묘>가 올해 첫 천만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기록되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룬 오컬트 영화가 한국에서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 것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파묘>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도 연일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며 무서운 기세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파묘>가 처음 개봉했을 때는 소위 ‘좌파영화’니 ‘반일영화’니 하는 논란도 있었고, 사실도 아닌 일본 쇠말뚝 이야기를 영화에 끌어들였다는 비난도 있었다.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가 ‘반일’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일인지도 궁금하거니와, 원래 허구인 영화에 다큐멘터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치자면 쇠말뚝보다야 일본 오니가 걸어 다니고 도깨비불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더욱 심각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는 그런 논란들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 역할을 하며 흥행에 더 큰 도움이 된 듯하다.
풍수나 무속행위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뭔가가 과학적이다, 또는 과학적이지 않다는 판정을 내리는 일이 항상 쉽지는 않다. 과학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은 좁게 말해 서유럽이라는 지역에서 16~17세기에 형성된 특정한 지식체계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철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과학의 원조’를 정립하고 있었다.
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기원전 7세기 밀레토스 지방의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놀랍게도 탈레스는 어지간한 교양과학책이나 과학사 교과서에서도 앞부분을 장식하는 인물이다. 과학이 철학에서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는 이른바 자연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레스는 과학의 역사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과학의 연원을 탈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여전히 신화나 주술적인 이야기에 매몰돼 있을 때 탈레스는 자연의 근원적인 요소(‘아르케’)가 무엇인지 따져 물었기 때문이다. 탈레스 이후의 철학자들도 탈레스의 기획에 따라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자신만의 답을 내놓았다. 엠페도클레스가 제시한 4원소설(흙, 물, 불, 공기)은 중세 이후까지 오랜 세월 서구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놀랍게도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나처럼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20세기의 과학자들이 제시한 ‘표준모형(standard model)’이라는 모범답안에 따르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는 쿼크와 전자 등 무려 17종에 이른다. 2600여년 전과 비교해 답은 달라졌으나 질문은 여전히 똑같다.
후대의 플라톤은 여기에다 수학적인 구조물을 도입했다. 즉, 플라톤은 다섯 개의 정다면체(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4원소와 우주 전체에 대응시켜 그 성질을 설명했다. 예컨대 흙은 4원소들 중에서 가장 덜 움직이고 안정적이어서 정육면체를 대응시키는 식이었다. 현대적인 감각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자연의 대상물에 수학적인 구조물을 대응시킨다는 발상은 지금도 여전히 과학자들이 고수하고 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질병이란 악령의 장난이나 신의 형벌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유럽에서 무려 17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혈액, 황담즙 등의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잃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4체액설을 주창했다.
중세 이후까지 2000여년 동안 서구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자연철학자는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쳐 뉴턴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과학혁명’이 완성되는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서 보이는 중요한 특징은 목적론적인 세계관이다. 만물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목적, 즉 그 본성을 위해 존재한다. 물체가 자신의 본성을 따라 움직이는 운동을 본성적 운동이라 한다. 흙은 무겁다는 그 본성을 따라 무거움의 중심인 지구로 향하고, 불은 가볍다는 그 본성을 따라 천상으로 올라간다. 본성적 운동에서 물체의 운동을 야기하는 것은 그 운동의 목적이라는 내적 동인이다.
갈릴레이나 뉴턴은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벗어나 기계적이고 인과적인 방식으로 자연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왜’라는 목적론적 방식이 아니라) 기술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예컨대 뉴턴의 유명한 운동 제2법칙에서는 힘을 운동량의 시간에 대한 변화라는 식으로, 운동에 대한 현상적 효과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힘을 정의한다.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보자면 묫자리를 잘 쓰면 조상님의 은덕이 후손까지 이어진다거나 귀신과 소통해 현상을 파악한다는 주장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 이전의 세계관에 해당한다. 영화 <파묘>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로, 오행(금수화목토) 사상의 이른바 상생상극 관계에 따라 금(金)이 목(木)을 극(剋)한다거나 그와 반대로 역극(逆剋)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닮았다.
물론 서구에서도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논리가 중세 이후까지 매우 오래 (어쩌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근대과학을 확립한 뉴턴조차도 역학이나 천체의 운동보다 연금술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성경 속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뉴턴이 자신의 역작인 <프린키피아>를 쓴 것은 다소 역설적이게도 신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었다. 뉴턴 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연금술에 매진했던 것이 이상하다기보다, 마지막 세대의 연금술사이면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뉴턴이 <프린키피아>라는 위대한 과학서를 남긴 것이 오히려 놀랍다고 하는 것이 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여전히 신의 저주와 심판, 그에 따른 세상의 종말, 잔인하고 야만적인 형벌 등이 횡행했었다.
그렇게 과학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뉴턴역학도 원리적으로는 사주명리학과 닮은 구석이 있다. 바로 결정론적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뉴턴역학에서는 모든 물체의 초기조건과 거기 작용하는 모든 힘을 알고 있으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리는 심상은 대체로 뉴턴역학의 결정론적인 세계관이다. 실제로 뉴턴역학은 행성의 미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하며 심지어 아직 관측되지 않은 천체의 존재와 그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알아내기도 했다. 이런 식의 결정론은 한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시의 정보로 그 사람의 인생 길흉화복을 예견하는 사주명리학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20세기에 형성된 현대물리학은 사뭇 다르다.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관장하는 원리인 양자역학은 결정론적이지 않고 모든 것이 확률론적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현상이 일어날 확률분포뿐이다. 또한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임의의 정확도로 어떤 입자의 초기조건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도 없다.
1000만이 넘는 관객이 영화 <파묘>를 즐긴 것은 쇠말뚝의 진실을 몰라서도, 풍수나 무속이 비과학적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심지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은 ‘듄’과 같은 과학을 가장한 허구적인 이야기(Scientific Fiction)도 즐긴다.
실제 풍수전문가들도 쇠말뚝을 박는 정도로는 한 나라의 기운을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풍수의 논리는 제쳐두고, 간단한 물리적인 추론으로 쇠말뚝의 영향을 예상해 볼 수도 있다.
한반도의 길이는 남북으로 대략 1000㎞다. 여기에 지름 30㎝, 길이 10m짜리 쇠말뚝을 박았다고 해 보자. 이를 사람 크기로 환산해 보면 어떻게 될까? 계산의 편의상 사람의 크기를 간단하게 1m라 하면 한반도의 길이와 100만배 차이가 난다. 따라서 지름 30㎝에 길이가 10m인 쇠말뚝은 지름 0.3㎛에 길이가 0.01㎜인 금속조각에 해당할 것이다. 이 정도면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아주 조그만 가시 같은 물체가 피부에 박히는 상황이다. 다소 불쾌한 기분이 들 수는 있겠지만 한 사람의 건강 상태를 크게 바꿀 정도는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을 호랑이로 바꾸더라도, 그렇게 조그만 가시가 호랑이의 허리를 끊어버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눈감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진실도 존재한다. 일제가 풍수목적이 아닌 이유로 쇠말뚝을 박아 측량을 하려고 했다면,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역사가 증명하듯 그것은 바로 식민지 조선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수탈’하기 위함이었다. 일제가 차라리 오직 풍수 목적으로만 쇠말뚝을 박고 ‘과학적인 수탈’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선조들의 삶이 그리 모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미신적인 쇠말뚝보다 과학적인 쇠말뚝이 더욱 아프다.
더더욱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같은 동족이 박은 쇠말뚝이다. 일제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일본 전범기업이 배상하라는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정부가 무시하고 제3자 변제라는 해괴한 방책을 제시한 것도 쇠말뚝에 해당한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인 고통이며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명백한 2차 가해이다.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등 독립지사들의 흉상을 철거한 것도 국민들의 가슴에 쇠말뚝을 박은 행위였다.
부당함에 스스로 ‘입틀막’한 지식인들이 완성한 ‘멋들어진 구조’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수포자’ 많아 수능서 심화수학 뺀다니…한국 과학 미래 포기하나
그뿐인가.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수많은 친일파들이 정말 쇠말뚝처럼 양지바른 곳에 묻혀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에서 그런 쇠말뚝을 모조리 ‘파묘’하겠다는 공약을 내거는 정당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이 내 가슴에 또 다른 쇠말뚝으로 박힌다.
어떤 말은 숫자를 감춘다. ‘냉전’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전의 세계대전 같은 ‘열전’과 달리 마치 이 기간 동안만은 전쟁 사망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전면전이 없었을 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토머스 체임벌린에 따르면 2차 대전 이후 1990년까지 한국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 2000만명 이상이 죽었다.
예산 ‘삭감’이라는 말도 그렇다. 예산의 합리적 재조정처럼 포장하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달려 있다. 33년 만에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되면서 수많은 연구원, 대학원생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왜 그런 숫자는 보이지 않을까. 냉전 시기 사망자는 대부분 아시아 지역에서 나왔다. ‘장기 평화’를 노래하던 서구 강대국들 눈에 죽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까닭이다. 예산 삭감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대체로 약자다. 공적 지출은 상당 부분 개인 노력이나 시장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지원, 성 인권 교육 사업과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콘텐츠 제작 등의 예산이 줄거나 전액 삭감됐다. 지방자치단체의 청소년 사업 90%가 중단 위기에 처했다. 학교문화예술교육사업 예산 절반이 잘려나가면서 예술강사들의 월평균 임금은 100만원에서 68만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수 도서를 선정해 국고로 구매하는 ‘세종도서’ 사업 등도 20%가 감축됐고 지역 서점 지원 예산도 줄었다. 공공돌봄을 제공하는 각 지자체의 사회서비스원 예산도 대폭 줄었다. 관계된 사람들의 삶은 급변하거나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런 예산은 정부로서는 ‘푼돈’일지 몰라도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돈이다. 그런 예산을 없애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개월간 24차례나 ‘민생토론회’를 개최하면서 특구 지정, 교통망 확충 등에 900조원이 넘는 돈의 투입을 약속했다. 경향신문 분석 결과 실제 추가되는 재정은 45조원가량이라고 한다. 감세에 앞장서며 건전재정을 외치는 정부라곤 믿기지 않는다.
케이블카 확대 약속서 생략된 것
‘후쿠시마 오염수’ 없는 총선
혁명적 공천, 서대문갑
정말 돈이 없는 것일까. 지난해 정부는 수서발 고속열차(SRT) 운영사인 에스알(SR)에 3590억원 규모의 현물 출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던 고속철도를 ‘경쟁체제’라는 명목으로 두 개로 쪼개고는 적자가 나자 수천억원을 쏟아부은 것이다. 의대 정원을 갑자기 늘려놓고 의료대란이 벌어지자 월 1882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밝힌 건 또 어떤가. 그 정도 돈을 쓴다면 현재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사인 간 계약이라며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를 미적대는 정부는, 같은 민간 부문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방어를 위한 사업장 보증 규모를 30조원으로 확대했다. 둘 중 어느 것에 개인 책임이 클까. 예산을 줄여놓고 이제 와서 이공계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에게 매달 연구비를 지급한다는 대목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이유는 간명하다. 예산 삭감이라는 말을 앞세우는 그들의 눈에는 냉전 기간 죽은 아시아인들처럼, 약자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선거를 맞아 또 뭘 짓고, 확충하겠다는 현수막이 방방곡곡 나부낀다. 그럼에도 결국, 숫자놀음을 넘어선 사회적 배분은 정치만이 할 수 있다. 쉽게 투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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