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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백의 사연 史淵]시대정신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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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4-05-0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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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의 개항, 1910년의 망국과 1945년의 해방은 한국 근대사의 결정적 전환 국면을 만든 역사인 데다,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사이기도 하다. 개항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과 국가가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되는 신호탄이었고, 망국은 그 편입의 귀결이었다. 해방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동시에 주어진 시작점이었고, 현재 진행형인 분단은 그 길의 귀결 지점이다. 개항, 망국, 해방은 외부의 요소가 급속한 전환을 추동한 결과라는 점에서 공통된 경험이다.
반대로 내부의 잠재된 힘이 결정적 전환을 이끈 경험도 있었다. 3·1운동과 이후의 여진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 3·1운동 직후 세계와 조선의 변화를 목도한 사람들은 ‘신시대(新時代)’라는 말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만큼 인생의 행로에서 이 대사건과 연관된 조선인, 특히 청소년기 조선인이었다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해방 후 남한과 북한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각자의 길을 갔던 사람들 다수는 청소년기에 이때를 겪었음을 고려하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어떤 점이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당시는 그것을 ‘시대사조(時代思潮)’라는 말로 주로 설명했지만, 오늘날에도 익숙한 단어인 ‘시대정신(時代精神)’이란 말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신시대의 시대정신이란 무엇이었을까.
3·1운동에서의 시대정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사람들은 군국주의와 침략정책이 소멸한 대신 세계가 정의와 인도를 표준으로 삼고 세계평화를 나서서 주장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보았다. 그래서 ‘3·1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하고 조선인이 자주민으로 살아가는 길이 조선 민족의 자유 발전을 오래도록 변함없게 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세계 개조의 대(大)기운과 함께 나아감으로써 전 인류가 함께 생존하는 권리를 행사하는 길임을 밝혔다. 달리 말하면 이천만 민중의 성충(誠忠)을 합하여 조선이 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 행위는 조선인의 복수심 때문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만세 시위 3개월은 1910년 이후 강요된 침묵 속에 익명의 타자들끼리 확인하지 못했던 사실, 곧 같은 공동체의 존재라는 사실을 한순간에 공유한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3개월은 부정해야 할 지난 과거를 압축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대개조의 시대정신에 편승해 혁신의 기운을 예지(豫知)한 시간이기도 했다. 만세 시위의 공간에서 활약한 청년학생들은 두 가지 시간을 조정할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
근대의 주체로 등장한 청년학생들은 성리학의 가치보다는 서구의 근대 가치에 더 가까이 있던 존재였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청년의 과거는 피가 업섯나니라. 피가 잇서도 랭혈이엇나니라 살겟다는 욕망도 업섯섯고 엇더케할가의 관념도 업섯던 터였으며, 사상계도 사상계러니와 지식열은 엇지 그리 박약하얏던지 학교에 보내기를 실혀하얏고 강당에 들기를 조와안이 하얏다면서 우리의 과거는 실르 무도덕이엇스며 무애정이엇다.(‘개벽’ 제2호)
하지만 세계대전이 끝나고 3·1운동을 겪은 청년학생들에게 세계는 보수의 시대가 아니고 진취의 시대였고, 속박의 시대가 아니고 자유의 시대였다. 그래서 청년학생들은 각자의 능력을 자유로이 개발하고 양성하여 사회의 진보를 촉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3·1운동 이후 문화를 개선하고 인스타 팔로워 구매 사상을 전파하려는 청년회, 구락부가 각지에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활동은 사회봉공(社會奉貢)이란 시대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본성을 발휘하고 자기의 신생(新生)을 창조하는 수양, 달리 말하면 내적 개조의 일환이었다. 이는 어떤 역사적 계통이 있는 활동이 아니었고, 각자 분산적이고 자발적인 의지와 사상에 기초한 활동으로 그때까지 한국사에서 볼 수 없던 사회현상이었다.
특히 그러한 현상의 절정은 1920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이었다. 연합회는 개조의 기운에 순응하고 민족의 고유한 생영(生榮)을 발휘하고자 결성된 단체였다. 이 조직은 청년학생들이 만세 시위의 전국성과 민족적 동질성을 체감하고 연대의식을 드러낸 진취적인 결과물이었다. 종교단체를 제외하고, 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비정치적인 단체로는 최초의 전국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세계 개조의 시대정신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개인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개인이 민족을 매개하지 않고 인류나 세계와 만나 대개조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개인주의라는 시선보다는 사회에 봉공하는 개인, 곧 집단의 주체로 상상되는 개인이어서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민족의 자유 발전이 가로막힌 현실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된 개인의 인격 가치는 더욱이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조는 고립된 개인의 도덕 수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국민주권 지향의 신시대
그런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은 이와 달랐다. 공공연하게 민족을 매개하며 세계나 인류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여전히 독립 만세 시위가 한창이던 1919년 4월, 상해의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헌장’을 제정했다. 국회를 설치하고 선거제를 실시하며, 남녀, 귀천, 빈부의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일절 평등하게 대우하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9년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치전환인 것이다.
국민주권 원칙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계승한 비전이다. 그때 독립운동가들은 한인끼리 주권을 주고받은 것이지 한인이 아닌 사람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행위는 근본 무효라면서 융희황제가 포기한 인민, 토지, 정치를 계승한 상속자가 자신이라고 명확히 했다. 그러면서 합법 상속자인 자신들이 물려받은 주권이란 소멸한 황제권이 아니라 새로 발생한 민권이라 밝혔다. 이는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 곧 인격적 가치가 있는 개인의 존재를 보호하는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함의다. 결국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실현키 위한 활동은 일본의 지배를 부정하는 항일운동일 수밖에 없고, 장기 지속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운동사의 일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세계 흐름과도 맞물린 방향성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폴란드 등 유럽의 8개 국가는 모두 공화제를 채택했다. 패전국 독일도 독일국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제1조에 명시한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결국 임시정부의 지향은 민족의 자유 발전과 인류가 함께 생존하기 위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맞는 방향성인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세계를 개조하는 기관’인 국제연맹에 가입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입장도 성립 가능하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의 평등만이 아니라 민족, 국가, 인류의 평등을 강조한 ‘정강’ 제1조의 정신과도 연결된다.
평등을 강조하는 흐름은 민중론이 확산하면서 더욱 힘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민중이란 말은 ‘3·1독립선언서’의 ‘이천만 민중’에서도 나왔듯이 3·1운동 이후 확산한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소수 귀족 계급이나 자본계급을 떠나서 절대다수의 무산대중을 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무산자란 ‘나는 돈 없는 놈이오’ 하는 말로, 빈민, 노동자, 소작인 등을 총대표한 말이다. 1923년 1월 민중직접혁명을 강조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1924년 4월 2대 강령 중 하나로 조선 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겠다고 내세운 조선청년총동맹에서 말하는 민중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는 동안 신시대, 개조라는 말 대신 ‘신사회’라는 말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사회 개조에 방점을 둔 계급의 시선이 더 강조되어 갔다. 시대사조가 바뀌게 된 데는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과 11월부터 열린 워싱턴회의 때 독립운동가들이 문전박대를 당한 일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정의와 인도의 세계를 구현하는 국제사회의 지원이란 외부 사조가 설득력을 잃은 것이다.
3·1운동 때처럼 주체의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최근의 경험은 촛불항쟁일 것이다. 이때가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분단 극복의 핵심 지렛대를 더 튼튼히 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촛불난동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되치기당했고, 그렇게 힘썼던 분단 문제는 단 1㎜도 현상을 변경하지 못했다. 이제 다시, 민주주의 확대와 분단 극복을 아우르는 시대정신을 찾아내 두 과제를 풀어가는 해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히틀러의 ‘나의 투쟁’ 독후사, 그럼 지금은?
이름 없는 독립군을 기억하자
민주공화, 대동세상의 현재이자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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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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